비움과 채움
정치의 현장을 떠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정치인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할 것 다해 봤는데 아쉬울 게 뭐 있습니까? 이제 그만 쉬시지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이제 마음을 비우시고 인생을 즐기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쩐지 나에게는 이런 모든 말들이 공허한 것처럼 들릴 뿐이다. 마음을 비우라니 무슨 마음을 어떻게 비우라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음속에 어떤 비울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있어야 비울 것이 아닌가 해서다. 스님들이 무소유(無所有)와 <비움의 미학>을 설법하고 있지만 그분들의 무소유 철학을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어떻게 감히 좇아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스님들도 처음부터 마음을 비웠다면 불문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법한 일인데 굳이 수도(修道)를 위해 머리를 깎은 이유는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것이 바로 득도라고 한다면 스님의 무소유에는 득도(得道)라고 하는 <채움>이 전제가 되어 나온 개념임이 분명할 것이다. 참으로 비움이 득도와 일직선상으로 통해 있는 것이라면 비움의 궁극적 행태는 <버림>으로까지 가는 것이고 그 버림에는 육신(肉身)까지를 포함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나눔>은 될지언정 비움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비움은 버림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나의 소유지분도 깡그리 무시할만한 용기가 마음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비움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비움>도 <버림>도 내마음속에 자리 잡아 본적이 없다. 내가 과연 나를 어떻게 감히 버릴 수 있을까?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 부족함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비움을 말하기 전에 채움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겠다 싶을 뿐이다. 나라는 존재는 죽을 때까지 채워도 못 다 채우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안다. 피카소가 말년에 유치원 애들 그림같이 그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물었다. 무슨 그림을 그렇게 유치스럽게 그리느냐고. 그때 피카소는 <그런 소리 말아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평생을 그린 거에요>하고 말했다. 이런 것들도 어쩌면 비움의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 말이다. 어떤 주교(主敎)가 머릿속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까지 내려오게 하는데 80년 세월이 걸렸다고 하는 자기 고백이 있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속에 비움이 꽉 찬 상태의 자화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곧 비움>인 것을 이제야 겨우 다시 한번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 같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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